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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공격 X파일 3] 이기근 “가장 힘들때가 득점 찬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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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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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근(40, 현재 경기도 양평 개군중학 감독)은 포항제철 소속으로 프로축구에서 두 차례나 득점왕을 차지한 공격수였다. 공격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프로축구 득점왕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차지한 사람은 지금까지 이기근, 윤상철, 김도훈 3명 뿐이다. 멕시코 4강 신화를 쏘다 1981년 가을철 중고축구연맹전. 우신고와 중대부고의 16강 경기에서 우신고 2학년이던 이기근이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팀은 3 : 0으로 승리했다. 이때의 활약 덕분에 그는 1982년 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19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에 선발됐다. 한국은 1982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 동부 예선에서 북한에 패해 3위를 차지했지만, 북한이 그해 11월 아시안게임에서 폭행으로 징계를 받는 바람에 운좋게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본선 4개국 리그전에 진출했다. 이 대회는 세계청소년대회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을 겸한 대회였는데, 한국·UAE · 중국 · 이라크의 풀리그로 펼쳐졌다. 이 최종 예선에서 이기근은 세 팀을 상대로 모두 선취골을 넣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1위를 차지했고, 드디어 1983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 출전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 2월, 청소년 대표팀은 세계 청소년대회를 앞두고 전력 담금질을 위해 태국 국제청소년대회에 참가했다. 이기근은 팀의 핵심 공격수였다. 신연호는 그의 공격 파트너였고, 김종부는 아직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지도 않을 때였다. 이기근은 오만전에서 2골을 넣었고, 결승전에서도 홈팀 태국을 상대로 멋진 다이빙 헤딩슛을 성공시켰다. 그의 결승골로 한국은 1 : 0으로 승리하며 우승했다. 그해 6월 한국 청소년팀은 멕시코에서 '4강 신화'를 이루었다. 3/4위전에서 한국은 폴란드에 1 : 2 로 패했지만 이기근은 골을 성공시켰다. 이때 이기근의 나이 만 18세였다. 1983년 가을에 그는 당시 국가대표 2진격인 88올림픽팀에 선발됐다. 9월에는 메르데카배대회에 출전, 홈팀인 말레이시아 타이거즈팀과 경기에서 이기근은 해트트릭을 기록해 3 : 1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큰 관심 속에서 한양대에 진학했다. 이기근이 뛰는 4년 동안(1983-1986년) 한양대는 전국 대회에서 일곱 번이나 우승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좋은 득점 찬스 온다 그는 1987년에 포항제철에 입단했다. 첫해 26 경기에 출전했고 6골을 넣었다. 이듬해에는 시즌 초반부터 맹활약했다. 4월에는 혼자 2골을 넣어 팀을 2위에 올려놓았고, 5월에는 종료 20초 전에 골을 넣어 팀의 1위를 지키기도 했다. 7월 10일 수원에서 열린 포철과 유공의 경기는 승점 1점차의 1·2위간 대결이었다. 포철의 이기근과 유공의 신동철은 득점 공동선두였다. 이기근은 3경기 연속골을 넣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신동철이 선취골을 넣고, 유공의 자책골로 동점이 되었다. 후반 29분, 유공의 황보관이 추가골을 넣어 포철이 다시 뒤졌다. 경기 종료 1분전. 마침내 이기근이 극적인 백헤딩슛으로 동점골을 성공시킨다. 그는 종료 직전이나 인저리 타임에 골을 많이 넣었다. 최근 떠오른 스타 박주영이 후반 40분 이후에 득점을 많이 하는 것과 비슷하다. "후반 30분이 지나면 22명의 선수가 모두 지칩니다. 그때 한 발이라도 더 뛰어야 합니다. 더 뛸 정신력만 갖추고 있으면 득점 찬스가 와요.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죠. 다른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할 때 가장 좋은 득점 찬스가 옵니다." 한양대부터 포철까지 그를 지도했던 이회택 감독도 힘을 주었다. "스트라이커라면 최소한 두 경기마다 한 골을 넣어야 한다고 감독님이 말했죠. 감독님의 그 말에 강박관념이 생길 정도였어요. 그러나 덕분에 골도 많이 넣었죠." 이기근은 1988년에 12골을 넣어 프로데뷔 2년만에 득점왕에 올랐다. 23경기에 출전해 12골을 기록했으니 두 경기마다 한 골을 넣은 셈이다. 이어 1991년에도 16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가 있는 동안 포철은 1988년과 1992년에 두 차례나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상상 속에서는 골 넣기가 쉽다 이기근 부친의 말도 그가 두 번이나 K리그의 득점왕이 되도록 도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 축구 선수로 자라는 그를 지켜보며 말했다. "상상으로 골을 넣어봐. 상상 속에서는 골 넣기가 쉽단다." 이로 인해 이기근은 언제부터인가 골을 넣는 장면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10분씩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것이다. "경기에서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공격 기회를 주욱 떠올렸어요. 그때마다 다르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보는 거죠. 그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면서 어떻게 움직여야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을까 생각했어요." "잘한 것보다 못한 것을 위주로 떠올렸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실제로 실수했던 상황과, 같은 상황이지만 상상으로 골을 넣은 것이 함께 남았어요. 똑같은 찬스가 반드시 온다고 믿었죠. 실제로 경기에서 같은 상황이 왔는데, 실수했던 것이 고쳐져서 움직였어요. 골을 넣었죠. 반복해 상상했던 효과를 보았습니다. 골을 잘 넣으려면 실수를 줄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는 훈련을 할때에도 실수를 하지 않을 때가 돼서야 멈추곤 했다. "저는 빠르지도 못했고, 돌파력이 있지도 않았어요. 그런 방면에서는 다른 훌륭한 선수가 많았지요." 하지만 그는 임기 응변에 능하고, 움직임이 빼어났다. KFA 기술국의 김남표 기술위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기근은 골을 넣을 수 있는 지역에서 위치 선정이 탁월하고, 효과적인 움직임으로 반 박자 빠른 슈팅을 날렸습니다. 공격수가 필요한 자리를 잘 찾아가는 것은 조직력 면에서 볼 때 큰 장점이죠. 상대 수비의 몸집이 크고 빠르다고 해도 영리하게 상대를 등지고 자기 공으로 만들었어요." 그의 드리블과 슛 동작은 권투에서 원투 잔 펀치와 잽을 던지다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모양과 비슷했다. 그는 프로리그 통산 264경기에 출전, 70골로 역대 득점 랭킹 9위에 올라 있다. 이 중에 페널티킥 골은 하나도 없이 모두 필드골인 것이 이채롭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포항제철, 부산대우, 수원삼성에서 10년간 뛰며 세운 기록이다. 1995년에는 프로리그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1996년 수원삼성에서 11골을 넣으며, 31세에 다시 두자리 수 득점에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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