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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X파일 8] 문정식 "나는 지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친구 주님 2014. 3. 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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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19:39

1950년대 최고의 공격수였던 故 문정식 선생 ⓒKFA
문정식은 1950년대 후반기에 아시아를 제패한 호랑이였다. 특무대 소속으로 동남아를 휩쓸며 17전 무패, 6년 동안 백전백승을 했던 축구 공격수를 위해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제대 경기에서 첫 패배

1962년 특무대와 연세대의 경기. 제대를 앞두고 문정식 준위는 쉬고 있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팀이 지고 있자 사람들은 문 준위 어디 갔냐고 난리가 났다. 그라운드 밖에 앉아있던 문정식은 일어났다. 도중에 경기장을 떠나 축구화를 가져왔고, 후반에 투입됐다. 그러나 특무대는 연세대에게 1-2로 패했다.

“우리 팀 전력이 앞섰다고 생각했는데 집중력이 떨어져서 지고 말았습니다. 주장 표식을 달고 선발로 뛰다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간 것도 그날 처음이었습니다.”

6년 동안, 정확히 5년 7개월 동안 문정식이 뛰면서 특무대는 무패를 자랑했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딱 한 번 진 것이었다. 문정식은 1958년부터 특무대에서 활약했으며 그 해부터 국제대회에서 17전 무패를 기록했다.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 동남아를 돌면서 맹위를 떨쳤고, 국내외를 넘나들며 6년 무패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지지 않으려는 투쟁심이 승리를 가져왔다

“나는 지고 싶지 않았어요. 무엇에 대해서냐. 바로 플레이에 대해서지요. 국가대표 선수가 상대 수비에게 가지고 있던 공을 뺏기거나, 패스 미스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공이 왔을 때 빨리 파악이 돼야 해요. 공을 잡고 나서 모든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와야 하죠. 여의치 않으면 패스를 해야겠지만, 가능하면 슈팅을 날려야 해요.”

“그라운드에서는 어디에 있을 때나 모두 중요하지만, 페널티구역 안에서는 더 침착해야 합니다. 상대 팀 수비가 한 명 붙다가도 그 안에 들어가면 모두 몰려들지요. 순간에 역작용 플레이를 할 것인지, 스피드 플레이를 할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죠. 그때 상대 수비를 두고 여유 있게 내 플레이를 할 수 있었죠. 지고 싶지 않아서 경기 감각과 기술을 연마했기 때문예요.”

“재미있는 기억이 있어요. 5-60년대에는 거의 모든 팀이 WM포메이션(3-2-5 또는 3-2-2-3 포메이션)이었는데 특무대는 4-2-4포메이션을 썼어요. 상대가 모두 스리백이라 우리 팀 4명의 공격수는 여유가 있었죠. 그때 내가 공을 잡으면 상대 선수들이 먹지 마, 먹지 마 외치면서 뒤로 물러섰어요.”

공격수가 공을 잡을 때의 상황을 운전할 때와 비교하기도 했다.

“안전운전을 위해서는 전방, 후방, 옆 차선의 달리는 차 속도와 흐름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되죠? 다시 말하지만 공이 내게 올 때는 얼른 주변을 파악해야 돼요. 패스할 곳, 슈팅할 곳, 상대 수비, 상대 골키퍼가 한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감각을 키우는 것이 팀과 선수가 연습할 부분이에요. 공을 잡아서 고개 들고, 찾아서 제2동작을 하면 늦어요.”

그는 누구보다 지지 않으려는 투쟁심이 강했다. 일본 경기에서 특히 투쟁심을 불태웠다고 했는데, 그가 뛰었던 한일전 5승1무1패의 기록이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1959년 한일전에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던 故 문정식 선생(왼쪽 슈팅하는 선수)
공격수의 매력은 골 만들기

박지성이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처음 입은 것이 2005년 10월 1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면서도 한동안 기록으로 남는 득점이나 도움이 없어 본인이나 축구팬 모두 경기 때마다 가슴을 졸였었다.

하지만 풀럼과의 원정경기 전반에 페널티킥을 유도해 판 니스텔로이의 선제골을 견인했고, 이후에도 절묘한 어시스트 2개로 웨인 루니의 동점골과 판 니스텔로이의 역전골을 도와 팀이 3-2로 승리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당시 한국의 축구팬들도 그 멋진 플레이를 생중계로 볼 수 있어서 더없이 즐거운 밤이었다.

이로부터 50년 전인 1956년 10월 31일은 박지성과 비견할 만한 한국 축구 스타가 데뷔한 날이다. 문정식은 동대문에서 열린 우리나라 국가대표팀과 미국 올림픽대표팀의 친선경기에 데뷔했다.

“신문에는 골 넣은 사람이 대서특필 됩니다. 축하할 만 해요. 좋아요. 그러나 골문 앞에 있는 선수에게 머리나 발로 정확히 맞춰주는데 골 못 넣는 공격수는 없잖아요.”

득점자만 인정하는 언론에게 아쉬운 점도 있지만, 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문정식은 특무대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자로 잰 듯한’ 패스로 어시스트를 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상대 수비와 멀리 떨어뜨려주는 완전한 어시스트는 동료 골게터에게도 인기였다.

“대표팀 숙소에 있으면 최정민, 조윤옥 같은 스트라이커가 침대에서 자는 내게 조용히 찾아와서 찬스 한 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웃음)”

문정식은 배재고, 특무대, 대한중석, 제일모직에서 선수로 뛰었다. 포지션은 모두 포워드(FW)로 기록되어 있지만 자신은 지금의 미드필더로 뛰었던 것 같다고 한다. 골을 넣는 것도 그의 재주였지만, 골을 만드는 것도 그의 재주였다.

공격의 투지를 전수한 지도자

1960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10월 14일 베트남과의 개막전에서 문정식은 자신도 한 골을 넣었고, 도움을 기록했다. 10월 21일 대만과의 결승전. 한국은 실업팀 선수로 구성됐지만, 대만은 홍콩 세미프로선수들이었다.

결승전에서도 문정식은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장악했고, 후반 5분 무렵에는 오른쪽 깊숙이 단독 드리블로 돌파하여 수비수 사이를 뚫고 슈팅을 날렸다. 0:0 팽팽한 균형을 깨는 결승골이었다. 문정식은 한국축구를 아시아 정상으로 올려놓았고, 대만의 팀 관계자들은 “한국에 저런 선수가 있었느냐”고 감탄했다.

그 해 11월 6일 효창운동장에서 칠레월드컵대회의 예선이 열렸다. 상대는 문정식의 투지를 더욱 불타게 했던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은 한국 선수를 보면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해요.”

문정식은 그때를 웃으며 회상했다.
그러나 전반 14분 공중 볼 경합에 의욕을 가지고 먼저 점프했던 문정식은 뒤에서 점프한 가다마와 부딛혀 중심을 잃고 떨어진다. 왼손을 짚었는데 그만 왼쪽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의 부상을 본 선수들의 선전으로 우리나라는 2-1로 승리했다.

1963년에 문정식은 감독 겸 선수로 제일모직 팀의 창단 멤버로 뛰었는데, 고졸 9명을 이끌고 팀을 훈련시켜서 1966년까지 해마다 열리는 7개의 대회에서 6개 대회의 우승권에 들었다. 그가 발굴한 고졸 9명 중에서 6명이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정도였다. 이어서 그는 1973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자동차보험의 감독을 맡았는데 실업 18개팀 중 18위였던 팀을 1975년에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후 해마다 한두 차례 우승을 안았다.

1973년 월드컵 예선에서 국가대표팀 코치, 1976년과 1984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현대 감독으로 있는 동안 23승 14무 12패를 거두며 끝까지 공격의 투지를 잃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그의 의지는 분명했다.

“나는 지고 싶지 않았어요.”

평생을 한국축구에 몸 바친 문정식은 2006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후배 축구인들의 애도물결이 끊이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문정식 : 1930년 출생. 1956-1962년 국가대표 선수. 1958 도쿄아시안게임 준우승, 1960 아시안컵 우승, 1960 대한민국체육상. 1976, 1984 국가대표팀 감독. 1997-2004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2006년 12월 25일 작고)


글=손성삼(KFA 기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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