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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 10] 최영일, 9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족쇄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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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 10] 최영일, 9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족쇄맨’
2010/08/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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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풍미했던 명수비수 최영일 ⓒ스포탈코리아 |
예나 지금이나 축구 대결에서 한일전은 최고의 빅매치로 손꼽힌다. 양국의 역사적 관계, 국제무대에서 앞서거니뒤서거니 실력을 다투는 경쟁 심리가 뒤섞이면서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 중반 한국과 일본의 긴장 관계는 극에 달했다.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고수하려던 한국과 ‘탈(脫)아시아’를 외치며 한국을 위협하던 일본의 대결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당시 양국 축구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인물이 있었으니 최영일(42살, 현 동아대 감독)과 미우라 가즈요시(요코하마 FC)다. 브라질 유학파로 화려한 개인기와 정교한 킥력을 갖추고 있던 미우라는 아시아 최초의 이탈리아(제노아) 진출 선수로 일본 축구의 자부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딱 한사람, 최영일 앞에서만큼은 힘을 쓰지 못했다. 끈질긴 대인 마크와 투쟁심으로 뭉친 수비수 최영일은 주요 경기마다 미우라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세계무대로 도약하려던 일본 축구가 번번이 한국의 벽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던 상황과 흡사하다. “사실은 제가 미우라 때문에 떴습니다. 미우라를 처음 상대했던 게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한국과 일본 모두 2002 월드컵 유치 신청을 했던 때라 한일전은 대리전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라커룸에서 나올 때 상대랑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했죠. 그런데 저쪽(일본)에 브라질에서 유학한 미우라라는 애가 있다는 거예요. 오기가 생겼죠. 한국 축구가 또 브라질 스타일에는 강하거든요. 미우라의 개인기가 워낙 좋았습니다만, 끈질기게 수비하면 제 풀에 지쳐버렸어요. 뭐, 제가 미우라를 좀 괴롭히긴 했지요. 덕분에 국민들에게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만….” 껄껄 웃으며 당시를 회상하는 최영일은 현재 모교인 동아대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지난 2000년을 끝으로 안양에서 은퇴한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어느 새 8년째다. 최영일에게로 걸음이 향했던 건, 어쩌면 이 시대 한국 축구에서 실종된 태극마크에 대한 사명감과 악착같은 승부 근성이 그리웠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악착같은 근성 키워 경남 남해 태생의 최영일은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생후 2년이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가 세 누나와 최영일의 생계를 책임졌다. 아이들이 좀더 ‘큰 물’에서 지내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최영일 가족은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머니는 강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막노동도 하시고 시장통에 좌판을 깔고 장사도 하셨습니다. 밑바닥의 일들을 모두 경험하신 분이죠.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아침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4시 20분이면 일어나서 동네를 돌았죠. 신문배달을 마치면 식사를 하고 학교에 나가 공을 찼어요. 그때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인 탓에 선수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늦잠을 못 자요. 9시, 10시까지 푹 자겠노라 마음먹어도 새벽만 되면 눈이 번쩍 뜨이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악착같은 근성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삶의 고단함을 느끼기에도 어렸던 나이, 최영일은 축구공에 자신의 꿈을 투사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머니도 최영일의 선택을 반대하지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무엇이든 밥벌이를 할 수 있고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머니가 만류하지 않으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했던 데다 마침 학교에서 축구팀을 5년 만에 재창단한 것이 축구를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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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K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가운데) ⓒ베스트일레븐 |
유망수비수로 발돋움한 고교-대학 시절 중학교 때까지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번갈아 맡았던 최영일은 부산의 축구명문 동래고로 진학하면서 유망 수비수로 발돋움했다. 동래고는 김호, 김호곤, 박성화, 정용환 등 전통적으로 대형수비수 육성에 공을 들이는 팀으로 유명했다. 최영일 역시 동래고에서 중앙수비수로 집중적인 조련을 받았다. “글쎄, 학교마다 전통이 있는데 동래고는 ‘수비수 물’이 좋았던 것 같아요. 수비수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제공권 장악력인데, 학교에 헤딩 훈련만 집중력으로 할 수 있는 기구가 있었어요. 박성화 선배도 그렇고 모두 헤딩력이 뛰어났죠. 저도 그 덕을 톡톡히 보았고요.” 어린 시절부터 길러진 남다른 승부근성과 성실한 훈련 태도는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됐다. 동아대로 진학한 후에도 이같은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인 훈련에도 땀을 쏟았다. “그 시기의 선수들이 다 그러하듯 저도 몇 차례 고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교 때부터 주장을 맡으면서 각별한 책임감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경기에서 지면 감독님뿐만 아니라 주장인 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다른 능력은 웬만큼 괜찮았는데 스피드는 뛰어나지 않았어요. 스피드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좋아지는 부분은 아니잖아요. 스피드가 떨어지는 대신 순발력으로 보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보통 주력을 100m 기준으로 재는데, 축구 선수에게 필요한 스피드는 20~30미터 내에서 이뤄지는 순간적인 움직임이거든요. 그래서 러닝 훈련에 공을 쏟았죠. 또 90분을 일정한 속도로 뛰기 위해서는 지구력도 필요하니까 산악 훈련을 꾸준히 했습니다.” 성실한 훈련 자세로 신임 얻어 동아대 시절 선보인 탄탄한 수비력으로 주목받은 최영일은 1989년 현대(울산)에 입단했다. 최영일은 입단 첫해부터 주전을 꿰차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당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1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대표팀이 합숙 훈련에 들어갔어요. 현대에는 최강희, 변병주, 최인영 선배 등 6명 정도가 대표팀에 차출됐는데, 주전의 절반 이상이 빠지니까 신입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가 생겼던 거죠. 제가 그 해 4경기인가 빼고 전 경기를 뛰었습니다. 그것도 추석 연휴를 전후해 맹장 수술을 하느라 뛰지 못한 거예요. 다음해에는 월드컵이 있었으니 당연히 대표선수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다고 겸손해하는 최영일이지만 성실함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퇴출’되는 게 프로의 생리다. 이어지는 그의 증언. “1991년도에 차범근 감독님이 부임해서 4년간 현대를 지도하셨습니다. 차 감독님은 선수 개인의 훈련 태도, 경기 내용 등을 반영해서 세부적인 항목으로 평가하셨어요. 차 감독님의 고과평가에서 매년 제가 1위를 했었지요. 그 정도로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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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예선 당시의 대표팀 (오른쪽 아래 주장완장을 찬 최영일) ⓒ베스트일레븐 |
오기와 집념으로 유지한 태극마크 소속팀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인정받았던 최영일이었지만 태극마크와는 좀처럼 연이 닿지 않았다. 최영일이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때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그해 1월 미국 현지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에 수비수 결원이 생기자 대타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이었는데, 아내가 선배 아내한테 무슨 말을 들었던 모양이에요. ‘가봤자 그냥 있다가 올 들러리인데 큰 기대하지 말라’는 요지였죠. 처음에는 큰 욕심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승부 근성이 발동한 거죠. 그걸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아내한테 들으니까 오기가 생긴 거예요. 결과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습니다. 하하.” 훈련장에서 코칭스태프의 신임을 얻은 최영일은 1994년 월드컵 멤버로 본선에 참가했고 조별 예선 3경기에 모두 출장했다. 한국은 폭염 속에서도 스페인, 독일 등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그 투지를 세계에 입증했다. 최영일도 당당히 선전을 펼친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아쉬운 98년 프랑스 월드컵 - 오렌지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94년 월드컵이 최영일의 축구 인생에 전환점이 된 대회였다면, 98년 월드컵은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대회다. 97년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승승장구하며 초강세를 보였던 한국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최영일도 마찬가지였다. 서두에 언급한 미우라와의 긴장 관계는 최영일을 아시아 최고의 ‘족쇄맨’으로 떠오르게 했다. 여기에 16강 진출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지면서 유례없는 ‘광풍’으로 번지고 있었다. “사실은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대회 앞두고 평가전을 치를 때 인대가 늘어났어요. 그래도 월드컵에 꼭 가고 싶었기 때문에 밤낮으로 재활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멕시코와의 첫 경기부터 모든 게 엉켰어요. 하석주가 퇴장당하고 역전패하면서 사기가 떨어졌죠.” “두 번째 네덜란드 경기는... 어휴, 지금도 생각하기 싫어요. 라커룸에서 나와 운동장에 들어갔는데 말 그대로 온통 오렌지색 물결인 거예요. 기가 질리는 거죠. 아무 생각도 안납디다. 어떻게 다섯 골을 내줬는지, 또 어떻게 다른 걸 막아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경기 후에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아직까지 그 경기 테이프는 안 봅니다. 그 이후로는 오렌지도 안 먹어요.(웃음)” 세계 축구의 중심이라는 유럽의 벽을 현지에서 실제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보인 경기력은 차라리 오기에 가까웠다. “선수단 분위기가 많이 어두웠죠.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이었고, 여기서 끝낼 게 아니라 우리 후배들이 계속 희망을 이어갈 수 있도록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렇게 하나로 뭉쳤던 거죠.” “지금은 해외 진출 선수가 많아졌고 또 그 선수들이 잘 해주고 있으니까 한국의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후배들이 잘 해주고 있어서 참 고마워요. 이럴 때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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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오른쪽)와 경합을 펼치는 최영일 |
“내 플레이가 좀 더티(dirty)했죠?” 최영일이 특급 수비수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역으로 좋은 스트라이커가 많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능력을 보유한 상대일수록 그의 수비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국내에서는 황선홍, 라데, 고정운, 김도훈, 샤샤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해외에는 미우라가 있었죠. 김현석도 워낙 뛰어난 선수였는데 주로 같은 팀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상대로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어요. 다들 움직임이 좋고 문전에서 찬스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어요.” “수비수는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상대 공격수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방향과 움직임이 달라져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공격수가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는 편이거든요. 그 길을 미리 읽고 계산에 두는 거죠. 제 경우 발이 느렸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활용했습니다. 또 좀더 강하게 몸싸움으로 밀고 나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뭐, 제 플레이가 좀 더티했지요?(웃음)” 최영일이 말하는 몸싸움은 일종의 심리전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 기술이 뛰어난 선수일수록 악착같은 수비에는 기가 질리기 마련이다. 미우라의 경우가 그랬다. “미우라는 좀 폭탄 같았죠. 제 풀에 터져버리는 스타일이었어요. 함께 헤딩 경합할 때는 몸채 실어버리고, 앞으로 나갈라치면 역방향으로 슬쩍 건드렸습니다. 아니면 내가 가는 길에 툭툭 잡아서 끌어내리는 식으로 좀 괴롭혔지요. 이게 일본 내에서는 악명이 높았던지, 어느날 일본에서 경기할 때 보니 카메라 한 대가 볼과는 상관없이 저와 미우라만 따라다니면서 찍어대더군요.(웃음)” 후배 앞길 위해 미련없이 은퇴 결정 최영일은 프로무대에서 장수했다. 1989년에 프로 생활을 시작해 울산에서만 8년을 지내고 부산에서 3년을 활약하다 중국(1년)을 찍고 다시 국내로 돌아온 시기가 2000년이었다. 당시까지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유지했던 최영일이었기에 체력이나 경기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은퇴를 결심했던 것은 어느 후배의 애처로운 목소리 때문이었다. “2000년에 안양(서울)에 입단했는데, 당시 신인으로 들어온 선수가 저랑 13년 차이 나는 이영표였어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입단한 최태욱이랑은 17살 차이였죠. 그때 어린 선수들이 프로무대에 등장하는 게 붐이었어요. 어느날 경기하면서 태클하고 일어서는데, 상대팀 후배(공격수)가 저를 보면서 ‘영일이 형, 살살 좀 해주세요’ 하더군요. 제가 한참 선배니까 대놓고 욕은 못하지만 원망 섞인 눈빛이었어요.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삼촌뻘인데, 내가 살기 위해서 저 까마득한 아이들을 밟고 서야되는구나. 이건 아니다,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겠다고 저 아이들을 이기려느냐 싶었던 거죠. 그 길로 당장 조광래 감독님을 찾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부상을 핑계로 그냥 누워만 있어도 거액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 필요없다고 생각했어요. 조 감독님이 ‘너 같은 놈 처음 본다’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조용히 현역에서 물러난 최영일은 잠시간의 휴식 후에 동아대 감독을 맡으면서 바로 현장으로 복귀했다. 제자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이다. “언젠가는 프로 감독, 대표팀 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있습니다만 당장 큰물에 나가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으렵니다. 지도자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풍부한 경험을 쌓아 잘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제가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대표 선수가 됐는데, 그때처럼 좀 늦더라도 천천히 빛을 발할 수 있는 덕장이 되고 싶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인터뷰=배진경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3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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