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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대한민국 인공위성의 아버지 "최순달 박사" 본문
불가능이란 없다 ‘최순달 박사’
엔지니어클럽 블로그 2014/12/04 21:44 Platform Talk 앱으로 보기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따뜻한 리더십 공존 과학기술자
"과학기술, 서두름보다 기초부처 차근차근 해야“
<지난 10월 18일 최순달 KAIST 명예교수가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故 최순달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시작으로 2호, 3호 발사를 성공시켰으며, TDX 개발을 통해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다. 이번 기사는 고인의 생전 인터뷰와 자서전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일부 대화 내용은 현실에 맞게 첨삭했다.>
"남들이 인공위성 개발한다고 하니까 웃던 시절도 있었지요. 예전에는 외국 나가면 '기술 동냥'하는 게 일이었는데, 지금은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기술을 배우러 와요. 짧은 기간에 크게 발전한 대한민국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최순달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공위성 우리별 1호, 2호, 3호 발사를 성공시키고 TDX 전자교환기 개발을 주도해 '1가구 1전화'시대를 여는 등 과학기술 불모지에서 대한민국을 인공위성과 통신 선진 강국으로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위엄으로 한 번 결정한 목표를 향해 일을 강하게 추진하는 과학기술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이지만 개척정신만 투철한 과학기술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포용력과 따스함이 있다.
국가를 위해 제대로 된 과학기술을 개척해보겠다는 그의 소명감과 리더십은 과학기술계를 이끌 때 더욱 빛났다. 후배와 동료들이 그를 믿고 따랐고 우주기술과 통신기술계에 우리나라 최초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다.
TDX 개발 '혈서'…국민혈세 헛되이 쓰지 않겠다
1931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말기 소년시절 광석라디오를 접하고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품게 됐다. 1950년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한 이후 단돈 25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전자공학 석사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NASA 제트 추진 실험실인 JPL연구소에서 근무하다 '유치과학자'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안정된 연구환경과 많은 과학자들이 있는 미국에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귀국을 선택했다.
국가 최초 민간기업 연구소 금성정밀연구소장으로 부임, 국방 유도무기 레이더 기술을 국산화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이후 1981년 정부로부터 전자통신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발령받았다. ETRI 연구소로 전화를 걸면 전화벨 소리 대신 ETRI의 역대 성과들이 소개된다. 그 첫줄을 장식하는 것이 고인이 추진해 성공한 TDX(시분할 전자교환기)다.
TDX는 우리나라가 ICT 강국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공헌한 개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은 TDX 전자교환기 개발을 주도해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10번째로 성공시켜 '1가구 1전화'시대를 개척했다.
그러나 TDX개발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 박사는 그 시절 천문학적 액수인 24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받기 위해 정부에 확신을 심어줘야만 했다.
당시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무모한 국책사업에 돈을 쏟아 붓느니 차라리 한강다리를 하나 더 놓아라'라며 TDX개발을 반대했다. 10억 원이 넘는 프로젝트는 군사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거의 전무했으니 240억 원 개발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최 박사는 정부에 TDX 혈서를 정부에 보냈다. '연구원 일동은 신명을 바쳐 TDX 개발에 최선을 다하되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배수진의 각서였다. 연구원은 3년 만에 TDX 개발에 성공해 교환기 부족에 따른 전화 적체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로써 한국은 통신 선진국에 진입했다.
우리 R&D자금 시장 할머니의 세금 “사회적 책임 가져야”
“개발 못하면 돌아오지 말아라”, “너희 유학비는 시장 할머니 전대에서 나온 돈이다. 사회적 책임 가지고 연구개발해라.”
최 박사가 후배 연구원들에게 늘 했던 말이다. 후배들은 그를 호랑이 선생님‘이라며 무서워했지만 그가 호랑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기에 멘토로서 그를 따르고 신뢰했다.
KITSAT(우리별) Series 왼쪽부터 KITSAT-1 (1992), KITSAT-2 (1993), KITSAT-3 (1999)
후배들에게 호랑이 멘토가 된 때는 KAIST 시절로 돌아간다.
최 박사는 영재교육기관으로 출범한 한국과학기술대학(KIT)초대 학장을 맡은 뒤 서울에 있던 석박사 과정생들을 모아 지금의 KAIST를 만들었다. KAIST 초대학장과 체신부 장관,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후 그는 1989년 KAIST에 복귀해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러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인공위성’이란 이름도 낯선데다 불모지다보니 국내개발이 힘들었다. 최 박사는 외국 유학을 통해 기술개발에 나서기로 하고 영국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KAIST 졸업생들을 영국 서리대학에 유학보냈다.
최 박사는 인공위성 기술을 배우러 가는 유학생 선발 면접에서 강조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사회적 책임'이다.
"KAIST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비싼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이유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희들 유학비는 시장 할머니의 전대에서 나온 돈'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유학생들이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해주길 바랬다."
그는 KAIST 인공위성센터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우주개발을 위해 남은 인생을 걸겠다'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최 박사의 모습에 막연히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유학생들의 자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최 박사의 애국심과 헌신적 태도, 당부 말을 새기고 그를 멘토로 생각하며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으로 떠난 연구진들은 성공하지 못하면 도버해협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에서 우리별 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남미 기아나의 쿠루 우주기지에서 최순달 교수(오른쪽서 두번째)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우리별 1호 발사 성공을 기뻐하고 있다. 사진=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 제공
“1992년 8월 11일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센터. 어둠이 가시지 않은 하늘에 환상적인 은빛 꼬리를 흘리며 날아오르던 발사 로켓은 수십 초 뒤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숨 막히는 침묵과 기다림은 ... 3단 로켓이 분리될 때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미션콘트롤룸 안의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술렁였다. 한국의 우리별 1호 위성이 로켓에서 순조롭게 분리됐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기억이다.” (최순달 박사 자서전에서)
우리별 1호는 영국 서리대학의 도움으로 제작된 소형위성에 불과했지만 인공위성 개발기술의 불모지인 우리나라가 처음 쏘아 올린 최초의 위성이 됐으며, 자국 기술로 우리별 2, 3호를 쏘아 올리는데 기반을 마련했다.
최 박사는 "'한국의 우리별 1호 위성이 로켓에서 순조롭게 분리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내 삶 전체를 통해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가슴에 각인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남들이 인공위성 개발한다고 하니까 웃던 시절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 나가면 '기술 동냥'하는 게 일이었는데, 지금은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기술을 배우러 온다"며 "짧은 기간에 크게 발전한 대한민국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우리별 시리즈 축적 기술로 ‘인공위성 벤처’ 도전
인공위성 개발 성공도 잠시, 초창기 인공위성 개발을 주도한 KAIST가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통합논란에 처하게 됐다. 통합은 불발됐지만 그 여파로 인공위성 개발 주역들이 센터를 떠나게 됐다.
최 박사를 비롯해 제자와 직원들은 인공위성 개발 사업 중심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독자 연구를 위해 인공위성 벤처 ‘쎄트렉아이’를 창업했다. 우리별 시리즈를 쏘아 올리며 기술력을 축적한 그들이었기에 쎄트렉아이 벤처 창업 후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이뤘다. 말레이시아와 맺은 200억 원 규모의 라자크새트 공급 계약이 대표적이다.
또 쎄트렉아이는 싱가포르와 태국에 위성 설계기술, 자세제어 시스템 등을 공급하며 매회에서 사업기반을 넓혀갔다. 기술 컨설팅 사업도 활발히 벌여 10개국 연구진들에 위성기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해외입찰에서는 유수 업체들과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브랜드 인지도나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쎄트렉아이는 우주시스템의 개발로부터 얻은 경험에 그 기반을 두고 인공위성 본체, 전자광학카메라, 위성영상수신처리 지상국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등 내실을 쌓았다.
이후 수주된 말레이시아 RazakSAT 위성과 아랍에미리트 DubaiSat-1 위성 발사에 이어 2013년 DubaiSat-2, 2014년 Deimos-2 위성까지 성공적으로 발사됨으로 소형지구관측위성 시장에서 최고 성능의 위성을 보유하는데 성공했다.
최 박사는 "벤처를 꾸릴 당시 쎄트렉아이가 소형 위성 분야에서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갖고 있음을 자신했다"며 "제자들이 연구와 경영에 열정을 갖고 노력하고 있는 만큼 훌륭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우주기술, 기초부터 탄탄 잊지 말아야”
"빨리빨리 정신이 잘 맞는 분야가 있고 맞지 않는 분야가 있다. 기술개발은 서두름보다 차근차근 해나가야 발전될 수 있다. 기초가 되는 부분부터 탄탄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우리나라가 우주기술 강국이 되기 위해 기초부터 탄탄히 쌓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연구개발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기술이라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핵심이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며 "마음이 급해서 작은 부분을 놓치고 빨리빨리만 한다면 언젠가 그 작은 부분 때문에 연구개발이 막히게 되어있다. 기초를 탄탄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앞으로의 과학기술 발전은 선후배의 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수많은 선배들이 마른땅을 노동과 억척으로 개척해 놓고 그 위에 후배들이 발전과 개척을 한 결과 이 만큼 성장했다. 앞으로도 선·후배의 협력이 성실히 이뤄진다면 곧 세계 5위의 부자나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