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주가 만난 사람들▶이란에서 만난 네스토리안]
다른 민족을 존경하고 그들 문화에 적응하며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성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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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파누스 교회 모습
| 이란 여성들은 외향적이고 외견상 다른 이성에 대한 거리낌이 없습니다. 외국인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물으면 기꺼이 응대해주고는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법도 없습니다. 이웃 나라 아프간에서는 상상조차 어렵지요. 아프간에서는 외간 남자가 여성의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뿐더러 사진을 찍다 봉변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같은 문화권이면서도 이란은 조금 다른 듯 보입니다. 그 다름이 궁금했습니다.
졸파는 테헤란에서 북쪽으로 500㎞ 떨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 맞닿아 있는 국경도시입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2500만 명이나 사는 이란 땅에서 졸파는 분단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적 교량역할을 하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서너 군데 밖에 없는 자유무역지대이지요.
이 졸파를 뒤로하고 아제르바이잔과 국경을 맞대고 흐르는 강줄기가 카스피해로 이어집니다. 미국 유타주와 아리조나주의 황량한 석회암 절경을 옮겨 놓은 듯 가히 장관입니다. 더욱이 석양을 벗 삼아 길고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모습이란 인생을 다 산 노인네의 깊은 경륜 같아서 경외감마저 자아내지요.
그러나 졸파를 둘러싼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주에는 과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풍미한 네스토리안 그리스도인들의 유적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의 종주국 이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난다는 건 이란이 유대인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기독교 유산을 철저히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과는 달리 이란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 것입니다. 물론 태어나면서 무슬림으로 태어났다고 규정하는 이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거나 이란인에게 선교하는 일에 관해서 적대적인 것을 제외하면 표면상으로 종교적 마찰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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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누스 교회는 14세기에 세워진 교회인데, 북부이란에 남은 아르메니아의 교회 유적지들 중 원형으로 남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난 2008년 7월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지금은 리모델링이 진행 중입니다.
네스토리안의 선교적 업적은 찬란한 역사적 사건으로도 남을 만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로마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고 교권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던 네스토리안. 콘스탄티노플에서 교부의 자리에 올랐던 네스토리아의 신앙은 신인양성설(神人兩性說)을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계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후대에 이르러 마르틴 루터 같은 이는 네스토리안 신학과 기독교 정통교리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내부에는 신학의 힘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고 세속의 권력에 야합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을 목도합니다. 498년 네스토리안은 로마와 결별하고 옛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기독교공동체인 수도원 형식을 빌려 신앙생활을 영위하면서 동방 기독교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세운 교회는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위구르와 몽골, 중국과 티베트, 동인도를 거쳐 심지어는 신라시대에 경교라는 이름으로 조선 땅에까지 선교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이후 네스토리안 교회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몰락할 지경이 되었지만 그들의 독특한 선교방식과 열정은 모든 세대에 걸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타 민족에 대한 존경과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능력, 성경을 다른 나라 방언으로 번역하여 전도하고 문화와 언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으로 이방족속을 섬겼던 이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교회의 모습과 이들의 교권에 연연하지 않고 이방민족을 향한 선교에 열정을 쏟았던 신앙인들의 고독한 기도가 졸파 산언저리 바위 틈새에서 신음하듯 품어져 나오는 영혼의 절규 같았습니다.
양국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