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이엠효소
- 코로나19
- 치유기도
- 다이어트
- 진견진
- 세르비아의 영성가
- 건강
- 벌침
- 콘스탄티누스
- 고매
- 들소
-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 타라빅
- 주나힘교회
- MSM
- 타일공
- 사우디 아라비아
- 갈레리우스
- 건강하자
- 축구
- 화장을 고치고
- 박성신
- 우재
- 근육과 인대 보호
- 이스라엘
- 이른비언약교회
- 고구마
- 뚜라미
- 탈원전
- 미카엘 타라빅
- Today
- Total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국기(國技)로 내전을 극복하다. 신 없이 써낸 신화 본문
국기(國技)로 내전을 극복하다. 신 없이 써낸 신화
CISM 회원국 : 코트디부아르
얼마 전 있었던 일본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첫 대결 상대는 디디에 드록바, 아야 투레, 콜로 투레 등이 포진해있는 아프리카 축구 최강의 국가 코트디부아르 이었습니다. 전반에 혼다 케이스케 선수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코트디부아르는 아야 투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일본의 골문을 좀처럼 열지 못하다가 후반 드록바의 투입으로 분위기는 전혀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36세의 드록바가 투입하자마자 보여준 월드클래스의 움직임에 견고하던 일본의 수비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코트디부아르는 드록바 출전 4분 만에 동점골에 역전골까지 성공 시킵니다. 과연 아프리카 최고의 축구 국가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미국명으로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라는 국가명을 가진 코트디부아르(Cote d'I voire)는 불어로 상아해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5세기에 세계에서 상아가 제일 많이 산출되는 국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가지게 됐습니다. 상아가 많이 난다는 것은 코끼리가 많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코트디부아르 축구팀의 별명이 ‘코끼리 군단’입니다. 프랑스령에서 1960년 독립한 코트디부아르는 커피와 코코아 생산량이 세계 1위인 ‘서아프리카의 모범국’입니다. 전 세계 커피, 코코아 생산량의 40%를 책임지고 있으며, 국가 수입의 대부분이 여기서 산출되죠. 이민자들에게 관대하고 여러 문화를 수용하는 대범함으로 모범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의 모범국’이란 이미지와 달리 지속되는 내전에 고통 받고 있는 나라라는 점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1960년에 독립했을 당시 초대 대통령인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은 33년 동안이나 장기집권을 합니다. 이민자를 적극 적으로 수용하여 코코아와 커피산업의 인력을 보충하는 정책이 국민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지속적으로 대통령에 선출 되죠. 때문에 코트디부아르는 전 세계에서 외국인 인구비율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됩니다. 적게는 4개 민족, 많게는 60개 민족이 한나라에서 살고 있는 셈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은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집권 초기에 살해 위협을 자주 받았었고, 그 당시부터 반란의 여지가 있었으며 때로는 정부군이 직접 나서서 그 여지를 제거하기도 하였죠.
1993년에 우푸에 부아니 대통령이 사망하자 앙리 코난 메리 총리가 집권하게 되며 아이보리인들(코트디부아르 원주민)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점차 국가가 분열하는 조짐을 보이던 중 정부의 부패, 사회적 혼란 등이 야기되자 로베르 구에이 장군이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그러나 구에이 장군이 2000년 대선에서 타 후보의 출마를 저지하자 대선 유혈극 등으로 결국 야권의 로랑 그바그보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이해관계가 급격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 설립한 군사정부가 또 다른 정치적 혼란만 야기하고 철수하게 된 것이죠. 결국 2002년에 반군이 조직되어 정부군과 직접적으로 대립을 하는데 이릅니다. 외국인 이민자가 많은 남과 아이보리인이 많은 북으로 갈려서 지속적으로 반군과의 전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쿠데타와 반란 등의 영향으로 코트디부아르엔 총 300만정의 총기가 등록 없이 방치되게 됩니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충돌과 전투가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조성하게 되었고, 2006년까지 그 상황은 점차 악화되어 절정에 치닫게 됩니다. UN평화 유지군이 코트디부아르에 파견된 시점도 그때입니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선수가 바로 ‘디디에 드록바’. ‘검은 예수’, ‘신’, ‘전쟁을 멈춘 사나이’등의 별명을 가진 걸출한 축구선수 드록바는 5세에 공부를 위해 어려운 형편임에도 프랑스로 이민을 가게 되고 프랑스의 무명 축구 선수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아 11세에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학교 성적의 하락을 야기했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를 못할 위기에 놓이자 본인이 좋아하는 축구를 위해 공부를 병행하게 됩니다. 19세가 되자 프랑스 유명대학의 경영학과 입학 통지서와 르망의 입단계약서를 동시에 얻게 된 드록바는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르망에 입단하게 됩니다.
몸이 약했던 드록바는 유럽 특유의 거친 몸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잦은 부상으로 고생했으나 양나방 갱강으로 이적하여 프랑스에 완전히 적응하여 활약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호세 무리뉴와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뉴 감독의 권유에도 마르세유로 이적하여 프랑스에서 MVP를 따는 등 최고의 커리어를 성취한 뒤 무리뉴의 끈질긴 설득 끈에 첼시에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에 케즈만 등 유명한 선수와 동시에 입단 하게 되면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드록바는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거친 유럽 스타일에 초반에는 애를 먹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최고의 선수의 명단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활약하던 중 2006년에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의 대표선수로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게 됩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코트디부아르에겐 최초의 월드컵 출전이었습니다. 당시 드록바의 조국 코트디부아르는 내전이 심화된 상태였고, 몇 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당시의 인터뷰에서 드록바는 무릎을 꿇어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코트디부아르는 최선을 다했기에 승리할 가치가 있는 최고의 팀입니다. 하지만 본선 진출로 기뻐해야할 지금도 저의 가난한 조국 코트디부아르는 내전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의 국민 여러분 제발 부탁드립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총을 내려놓고 전쟁을 멈춰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이후 거짓말 같이 1주일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선 단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당시 최악의 조 배정으로 1승 2패를 기록한 코트디부아르는 조별예선 탈락을 면하지 못했지만, 본선 진출보다 더 위대한 신화를 이룩해 낸 그 감동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스토리로 뽑힙니다. 그 후 2007년,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실제로 전쟁이 막이 내리게 됩니다. 그바그보 대통령이 직접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반란군과 평화 협정을 맺게 된 것이죠. 이에 큰 공헌을 한 드록바는 2007년에 UN홍보대사가 되기에 이르고 2008년엔 자선협회를 설립하여 구단주와 동료의 도움으로 의약, 식음료, 축구공, 유소년 시설 등의 지원을 자국에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합니다. 2009년엔 60억의 개인 자산을 종합병원에 기부하는 등 진정한 조국애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게 축구는 국기(國技)이며, 기적의 스포츠입니다. 2회 세계군인체전에서 축구로 동메달을 획득한 저력이 있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국가의 희망을 거는 나라입니다. 2010년에 내전이 재 발발 했지만, 2011년에 다시금 내전은 종식되었고, 은퇴를 선언한 드록바에게 대통령이 직접 부탁을 하여 이번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6년과 마찬가지로 2010년에도 코트디부아르는 최악의 조에 배정되어 1승 1무 1패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16강 진출해 실패했습니다. 이렇듯 사실 드록바는 ‘신’이 아닙니다. 경기장 밖에서의 드록바는 매우 따뜻하고 정이 많은 선수라고 전해집니다. 드록바를 비롯한 코트디부아르의 선수 전원이 매너도 좋고 멋진 선수들이라고 합니다. 드록바를 비롯한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그리고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2006년에 보여준 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눈물이 만들어낸 인간의 아름다운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평화의 정신이 내년 2015년에 문경에서도 바로 이 코트디부아르라는 서아프리카의 나라로부터 모두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