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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 39] 박태하, 그 누구보다 성실했던 포항의 전설 본문

나의 선수시절(대한민국)

[나의 선수시절 39] 박태하, 그 누구보다 성실했던 포항의 전설

영원한 친구 주님 2014. 2. 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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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21:24

항상 꾸준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줬던 포항의 전설 박태하 ⓒ이상헌
현역 시절 박태하(42)를 상징하는 말은 '포항맨'이었다. 대구대를 졸업하고 1991년에 포항에 입단한 그는 2001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포항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다. K리그 통산 261경기를 모두 포항 유니폼을 입고 나섰고, 46골-37도움을 기록하면서 '포항의 전설'로서 팬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그는 인격적으로도 최고의 선수였다. 그렇기에 박태하는 동료 및 팬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영덕의 어촌 소년, 백사장에서 축구를 시작하다

경북 영덕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자란 박태하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백사장에서 축구를 하면서 감각을 키웠다. 그리고 축구부가 있었던 강구초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축구의 길로 들어섰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이 영덕의 어촌이었는데, 백사장에 축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어요. 거기서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공놀이를 했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정식 축구부에도 가입했고요. 당시에는 축구 선수를 한다고 하면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죠."

결국 박태하는 강구중에 진학한 이후에는 2년간 축구를 쉬어야 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결국 3학년 때 다시 축구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경주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며 대기만성형 선수로서 성장했다. 포지션은 축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잠시 스트라이커를 봤지만, 이후에는 줄곧 미드필더, 특히 측면 미드필더로 활동했다.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모두 하고 축구를 했기 때문에 반대가 심하지 않았는데, 중학교 올라가서는 수업에는 거의 못 들어가고 축구에만 매달리는 형태이다 보니 부모님 반대가 심했죠. 그래서 축구를 접어야 했어요.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정말 축구를 하고 싶어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몇 달간은 부모님 몰래 가방에 축구화를 숨겨서 다녔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무명이었던 아마추어 시절, 끊임없는 노력으로 포항 입단

경주종고와 대구대를 거치면서 박태하는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스타급 선수들이라면 거치는 청소년대표 경력도 전무했다. 더군다나 대구대는 그가 입학할 당시 창단 2년째를 맞이하는 신생팀이었다. 그러나 박태하는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꾸준히 노력하고, 축구에 전념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기량을 늘려나갔다.

"어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어요. 항상 9시경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 30분쯤, 늦어도 6시에는 새벽훈련을 나갔죠. 당시에는 전문적 지식도 없고, 피지컬 코치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선배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봤다가 개인훈련을 하곤 했습니다. 러닝도 하고, 스피드 훈련, 볼 컨트롤 훈련, 기술 훈련 등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날씨와 상관없이, 휴가 중이라도 매일 꾸준히 했죠. 그런 습관이 선수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프로에서 성공하고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린 선수치고 청소년대표 한번 안 해본 선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대구대 시절에는 창단팀이다보니 팀이 강하지 않아 주목을 받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요."

대학을 졸업할 무렵, 박태하는 프로가 아닌 은행권 팀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대구대가 신생팀이긴 하지만, 전국대회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서 관심을 받기도 했고, 그로 인해 여러 은행권 팀들이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K리그의 명문 포항(당시 포철)은 같은 지역권에 있는 대구대와 자주 연습게임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박태하의 가능성을 눈여겨봤다. 결국 박태하는 극적으로 포항에 입단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됐다.

"대학 2~3학년 시절만 해도 제 능력으로 K리그에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거기에 은행권 팀들과 할렐루야 등에서 제의가 와서 그 쪽으로 기울었었죠. 은퇴 후에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4학년 막판, 드래프트를 2~3개월 앞두고 대구대 손종석 감독님이 포항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당시에 포항이 가까운 우리와 연습게임을 자주하면서 저를 좋게 평가했었나봐요."
92년 포항에서 우승을 차지할 당시의 박태하(왼쪽에서 3번째) ⓒ베스트일레븐
'포항맨'으로서의 시작

1991년 포항에 입단한 박태하는 초호화멤버 속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그는 프로 첫 해에 31경기에 출장해 3골을 기록했다. 당시 포항은 최순호, 최상국, 최문식, 이흥실, 이기근, 박경훈, 나승화, 공문배, 김상호, 조긍연 등 한국축구를 대표할 만한 스타들이 즐비했다. 그 속에서 무명의 신인 박태하가 주전급으로 활약을 펼쳤던 것.

"당시 포항은 대표급 선수들로 가득 찼던 팀이었어요. 동계훈련을 할 때에도 제가 경기에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남해로 합숙을 갔을 때는 발목을 약간 다친 적이 있었는데, 사실 2~3일만 치료하면 나을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경쟁이 무서워서 휴가를 내고 집에서 1주일 정도 쉬었습니다. 집에서 쉬는데,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충분히 도전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심기일전해서 도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다보니 초반에는 좌절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당시 허정무 감독님이 계속 믿고 출전을 시켜주셨죠. 그러면서 좋은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다보니 저도 점점 좋아지더라고요. 몇 경기 지나니까 향상되는 느낌이 들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제가 기술이 그렇게 뛰어난 선수는 아니지만, 다른 선수들이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주위에서는 제가 정말 많이 뛴다고들 하더군요. 제 스스로는 잘 모르겠는데, 공을 따라 다니다보니 많이 뛰었나봐요.(웃음) 무엇보다 제가 좋아서 하니까 모든 것이 즐거웠어요. 연습할 때도 즐겁고, 기다려지고 그랬죠.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의욕도 충만하고 스스로 많이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프로에서의 첫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하는 두 번째 시즌에는 더욱 일취월장한 기량을 뽐냈다. 35경기에 나선 박태하는 5골-7도움을 기록하면서 포항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시즌 종료 2경기를 놔두고 선두를 달리던 일화(현 성남)와 맞대결을 펼쳤는데, 우리가 3-1로 이겼죠. 최종전에서는 두 팀 모두 이기면서 결국 우리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어요. 막판에 3연승을 거둔데 반해 일화는 부진했고, 극적으로 역전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웃음)"

"당시 우리 팀은 베테랑 선배들에게서 신진 선수들에게로 조금씩 세대교체를 꾀하는 시점이었어요. 그러면서 팀이 활력이 넘쳤고, 요소요소에 좋은 선수들이 배치되어 있었죠. 개인적으로도 2년차 징크스는 전혀 없었어요. 좋은 동료들과 같이 축구를 하면서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2년차에는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죠."
96년 대표팀에서 활약할 당시의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상무 입대, 그리고 A매치 데뷔

프로 3년차인 1993년, 박태하는 무릎 인대 부상으로 동계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리그 초반에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5경기만을 소화한 채 상무에 입대하게 됐다. 한창 프로에서 자리를 잡고 활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쉬움은 남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상무에서의 2년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상무 복무 도중에 결혼을 했으며, 대표팀에 선발되어 A매치도 치렀다.

"생각해보면 상무는 제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는 시기였어요. 일단 상무 입대 4개월 후에 결혼을 했죠. 아내는 포항 지역 국민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지점이 포항 숙소 앞이었어요. 우리 급여 담당이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웃음) 사실 아내가 인기가 좋아서 다른 선수들과 경쟁을 펼쳐야 했는데, 제가 이겼어요. 처음에 커피 한 잔 하자고 했더니 시간 없다며 반응이 없더니 나중에는 결국 만나게 됐고, 결국 상무 입대 후 결혼까지 하게 됐죠."

"당시 상무는 토요일마다 외박을 줬었는데, 만약 제가 총각이었다면 친구들과 놀면서 흥청망청 보냈을 수 있죠. 그런데 결혼하니까 외박 주면 무조건 포항 내려가서 아내와 보내고 올라오곤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웃음)"

상무에 있는 동안 박태하는 A매치 데뷔전을 치르는 감격을 맛봤다. 그는 1994년 2월 16일 루마니아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대표팀에는 91년에도 선발된 적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2군 성격이었던 백호였고, 따라서 공식 A매치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감회가 새로웠죠. 91년에 백호로 대통령배에 나가긴 했지만, A매치로 인정받지는 못했거든요. 사실 요즘은 선수들의 기량이 평준화되어 다양하게 선수들이 선발되지만, 당시만 해도 한번 대표 선수가 되면 바뀌지 않고 오래 갔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말 기뻤죠. '내가 잘하고 있구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저는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 경쟁에 대한 부담감은 적었어요. 경기 출전 여부에 크게 개의치 않았죠. 기회가 오면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어요. 그런 과정 속에서 저보다 더 나은 선수가 있다면 당연히 그 선수가 뛰어야 한다는 마인드였었죠."

"생각해보면 제가 A매치 11경기에 나가서 7골을 넣었어요. 평균 득점으로 봤을 때는 대단한 수치 아닌가요?(웃음)"

돌이켜보면 박태하는 대표팀에 합류했다가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항상 낙마하고 말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도 그랬다. 그러나 이런 부분까지도 박태하는 담담한 반응이었다.

"물론 아쉬움이야 있죠.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제 능력을 알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제 나름대로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 많은 노력을 했고, 정말 열심히 했지만, 제 능력이 거기까지였거든요. 대표팀이 아니더라도 소속팀에서 오랜 기간 활약하면서 팬들의 기억 속에 남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2000년 4월 잠실에서 열린 한일전에서의 박태하(뒷줄 17번) ⓒ피치포토
포항으로의 복귀, 잊지 못할 95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

상무 제대를 눈앞에 둔 95년 말, 소속팀 포항은 K리그 챔피언을 놓고 일화와 승부를 펼치게 됐다. 10월 30일에 제대한 박태하는 곧바로 11월 4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에 교체로 출전했다. 그리고 K리그 최고의 명승부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포항에서의 2차전에서는 풀타임 출장했다. 승부를 가리지 못해 치러진 3차전에서도 박태하는 선발 출장했고, 결정적인 패스까지 만들어주며 활약했으나 팀은 패하고 말았다.

"제대 날짜가 10월 30일이었어요. 그 전부터 포항 허정무 감독님이 전화가 오셔서 몸을 만들어놓으라고 하시더군요. 말년 휴가 나가서도 포항에 합류해 훈련하고 그랬어요. 그렇다고 해도 2년간 상무에 있다가 갓 합류해서 챔피언결정전 같은 큰 경기에 나가는 것이라 부담은 컸죠."

"동대문에서의 1차전에서는 후반 15분경에 투입되어 분위기를 익혔고, 포항에서의 2차전 때부터 선발로 나갔죠. 특히 2차전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선명해요. 당시 포항팬들의 열기는 대단했어요. 스틸야드가 계단까지 다 꽉 차서 서서 구경하시고 그랬습니다. 전반에 선홍이가 2골을 넣어 2-0으로 이기면서 축제 분위기였다가 후반 들어 3골을 내리 내주면서 무너지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라데가 동점골을 터뜨려 3-3으로 마쳤죠. 정말 최고로 다이내믹했던 경기였어요."

"결국 두 경기 모두 무승부여서 안양에서 3차전을 치르게 됐죠.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경기 중 하나인데, 제가 페널티 에어리어로 침투하는 장영훈에게 결정적인 침투패스를 했어요. 그 과정에서 파울이 있었는데, 판정이 미숙했어요. 우승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죠. 결국 연장 막판에 이상윤에게 결승골을 내주면서 패하고 말았어요."
98년 울산전에서의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또 한 번의 아쉬운 순간, 98년을 맞이하다

포항에 정식으로 복귀한 박태하는 96년과 97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96년에는 36경기에 나서 9골-4도움을 기록했고, 97시즌에는 18경기에 나서 6골-4도움을 올렸다. 그리고 맞이한 98시즌은 박태하에게 잊을 수 없는 시즌이었다. 당시 포항은 '최강 트리오'로 불리웠던 홍명보-황선홍-라데가 모두 팀을 떠난 상태였다. 96시즌을 끝으로 라데가 팀을 떠난 데 이어 홍명보도 97년 중반에, 그리고 황선홍도 98년 시즌 중반에 일본으로 이적했다.

박태하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98시즌에 총 38경기에 나서 9골-10도움의 맹활약을 펼쳤다. 포항은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전을 펼쳤고, 새내기 이동국과 백승철, 베테랑 고정운 등의 가세도 큰 힘이 되었다. 이렇게 신구조화 속에서 기세를 탄 포항은 정규리그를 한 경기 남겨놓은 시점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14일, 안양(현 서울)과의 리그 최종전이 포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후반 종료 직전까지 2-1로 앞서고 있었던 포항은 후반 45분에 안양 무탐바에게 코너킥 헤딩골을 내주면서 2-2 동점을 허용했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최종전에서 승리한 수원과 울산에게 1-2위를 내주고 말았다.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할 수 있었던 포항은 전남과 준플레이오프부터 치르면서 올라가야 했다.

"당시 홍명보, 황선홍이 모두 일본으로 진출한 상황에서 주장을 맡았는데, 저도 30줄에 접어든 후였지만 골도 많이 넣고, 도움도 많이 기록했죠. 저의 새로운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어요.

"팀 자체가 탄탄했어요. 선수들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융화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당시 박성화 감독님의 전술을 선수들이 잘 이해했죠. 이런 부분이 팀으로 승화되면서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양과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는 아직도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사실 그 경기에서 저에게 1:1 찬스가 세 번 정도 왔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1골만 더 넣으면 '10-10 클럽'에도 가입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쉬움이 더 컸죠. 그 중에 하나만 넣었어도 리그 1위로 마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안 되더군요. 그리고 후반 종료 직전에 무탐바에게 헤딩 동점골을 허용하는 순간은 기억하기도 싫고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만약 그 때 1위로 올라갔다면 포항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경기력도 좋았고 분위기도 최고조였으니까요."

결국 1위에서 3위로 내려앉은 포항은 전남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간신히 승부차기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1-2차전 역시 95년 못지않은 명승부였다. 포항에서의 1차전에서는 0-1에서, 후반 44분에 2-1로 역전시켰고, 후반 48분에 2-2로 따라붙자 후반 51분에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백승철의 대포알 중거리 슛으로 3-2를 만들었다.

울산에서의 2차전에서도 0-1로 끌려가던 후반 40분에 박태하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챔피언결정전을 확정짓는 듯 보였으나 후반 45분에 CNN에서도 화제의 영상으로 소개되었던 골키퍼 김병지의 헤딩 결승골로 1-2로 패하면서 챔피언결정전행이 좌절됐다.

"정말 드라마틱한 플레이오프였죠. 포항에서 극적으로 이기고, 울산에서도 종료 직전까지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끝나기 직전에 프리킥 상황을 내줬는데, 병지가 올라와서 골을 넣었죠."

"그 때 병지와 헤딩경합을 했던 사람이 접니다.(웃음) 제가 원래 헤딩에 강한데, 그 때는 시간도 다 지났고, 순간적으로 병지가 올라오니까 누가 막을지 순간적으로 당황한 상태였고, 얼떨결에 볼이 오길래 같이 떴는데 병지 머리에 맞고 말았죠. 정말 허탈한 순간이었어요."
포항의 영원한 전설 박태하 ⓒ베스트일레븐
포항의 황금기와 쇠락기를 경험하며

98년, 다시 한번 우승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포항은 조금씩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98년을 끝으로 베테랑 수비수 안익수, 공문배가 현역에서 은퇴했고, 살림꾼이었던 수비형 미드필더 서효원도 중국으로 진출했다. 젊은 선수들은 이제 '전통의 명문 포항'보다는 수도권 팀을 더 선호하면서 선수 수급도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도 박태하는 특유의 근면함으로 팀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주축 선수들이 빠져나가는 자리를 새로운 선수들이 채워야하는데, 여러 여건상 그렇지 못했어요. 포항은 축구팬들에게 항상 명문으로 인식되었는데,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런 부분이 퇴색되기 시작했죠."

"정말 화려했던 90년대 중후반을 돌이켜보면 경기에 나가서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지고 있어도 역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죠. 멤버들 하나 하나가 정말 뛰어났거든요. 저로서는 그들과 함께 했던 것 자체가 행복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라데가 생각나요. 지금도 가끔씩 통화를 하는데, 여전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크더군요. 저번에 대표팀이 벨라루스전을 할 때에도 왔었어요. 숙소로 찾아와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죠. 아직까지도 포항에서의 생활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더군요. 숙소 가는 길을 회상하기도 하고, 큰 딸을 성모병원에서 낳았던 일도 이야기하고...(웃음) 지금은 에이전트 일도 하면서 지도자하려고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하더군요."

현역 은퇴, 포항맨으로서 남다

박태하는 2001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001년에도 그는 32경기에 나서 1골-6도움을 기록하면서 자기 몫을 해냈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컸다. 그의 기량과 경험을 탐낸 다른 구단들이 입단 제의를 했지만, 박태하는 '포항맨'으로서의 은퇴를 택했다. 박태하는 프로 생활 내내 포항의 유니폼만 입었으며, 포항의 17번은 당연히 박태하의 것이었다. 포항팬들 역시 '포항 최고의 레전드'로 홍명보도, 황선홍도 아닌 박태하를 꼽았다.

"그 당시 나이가 34세였어요. 사실 충분히 더 뛸 수 있었고, 다른 팀에서도 제의는 많이 들어왔죠. 그런데 제 나름대로 고민해본 결과 포항에서 뛰지 못할 바에는 은퇴하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만큼 포항이란 팀은 저에게 특별한 팀이었고, 이 팀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죠."

"포항에서 줄곧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 이후에도 포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과감하게 결정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결국 나중에 파리아스 감독을 도와 지도자로서도 우승을 하면서 포항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모두 우승하는 기쁨도 누리게 됐죠.(웃음)"

"17번이라는 번호는 저에게 정말 특별해요. 96년에 CF도 찍었는데, 등번호 때문이었죠.(웃음) 처음 포항에 왔을 때는 20번이었다가 92년부터 17번을 달았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었어요. 그런데 계속 달다보니까 애정이 생기고, 거기에다 CF까지 찍으니까 애정이 집착으로 바뀌었죠.(웃음)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번호가 되었어요."
지도자의 길을 충실히 걷고 있는 박태하 코치 ⓒ이상헌
노력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

현역 은퇴 후 박태하는 지도자로서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밟아나가고 있다. 포항에서 스카우터를 거쳐 코치로 활동했던 그는 파리아스 감독과 함께 2007년 K리그 챔피언의 기쁨을 맛봤으며, 이후에는 허정무 감독을 보좌해 대표팀의 코치로서 활동했다. 그는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이번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에 있어서도 제 몫을 했다.

이제 조광래 감독과 함께 대표팀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박태하. 항상 연구하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파리아스 감독님과 허정무 감독님을 모시면서 지도자의 노하우를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이제 조광래 감독님도 잘 보좌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야죠.(웃음)"

"지도자를 하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은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도 많잖아요. 지도자가 선수보다 아는 것이 없으면 팀을 장악할 수가 없어요.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열정을 가진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어떤 일이든 열정과 흥미를 갖고 일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요. 선수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열정을 운동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요. 앞으로 조금씩 노력하면서 완성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 나아갈 겁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8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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