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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나의 선수시절41] 김풍주' K리그 경기당 최소 실점율의 주인공 본문
'꺽다리 골키퍼'로 유명했던 김풍주(46)는 80년대와 9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했던 골키퍼 중 한 명이다. 당시로는 보기 힘들었던 191cm의 장신이었던 김풍주는 큰 키와 긴 손을 이용해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안정적인 방어능력으로 대표팀과 K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1983년 멕시코 FIFA U-20 챔피언십 4강 신화의 주역이었으며' 88 서울올림픽과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또한 김풍주는 1982년(K리그는 83년부터 시작)부터 1995년까지 대우(현 부산)에서 활약하며 K리그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K리그 역사상 100경기 이상 출전 골키퍼 중 경기당 평균 실점율이 1실점 미만인 선수는 그와 최인영이 유이하다. 김풍주는 K리그 통산 181경기에 출장해 158실점을 허용' 경기당 0.87실점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인영이 176경기에 174실점으로 경기당 0.99실점임을 감안할 때 그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참고로 K리그를 대표했던 골키퍼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김병지 경기당 1.00실점(526경기 525실점)' 김영광 1.01실점(200경기 203실점)' 정성룡 1.01실점(133경기 134실점)' 이운재 1.04실점(343경기 358실점)' 신의손 1.11실점(320경기 356실점)이다.
뒤늦게 축구의 길로 뛰어들다
경기도 김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풍주는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성장했던'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소년이었다. 그는 논두렁에서 벼를 베고 나면 거기서 볼을 찼고' 축구 중계가 있으면 시간과 관계없이 밤을 새서라도 경기를 보는 열혈 축구소년이었다. 결국 김풍주는 축구를 너무 좋아했던 나머지 고등학교 진학 후에 축구부 문을 노크했다.
"통진중까지는 축구부 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말 축구가 하고 싶어서 많이 늦었지만 고교 진학 후에 통진고 축구부에서 테스트를 받았죠.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고요.(웃음) 마침 양곡고에서 축구부를 창단한다고 해서 그 쪽으로 갔고' 감독님이 저보고 골키퍼를 하라고 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필드 플레이어가 하고 싶었지만' 축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어 기본기는 전혀 없고 키만 컸거든요. 당시에는 키 큰 선수를 좋아하는 풍토도 아니었어요. 기술적으로나 갖춰진 것이 없어서 골키퍼를 하게 됐죠.(웃음)"
고등학교 진학 후에야 축구를 시작한 핸디캡은 김풍주를 힘들게 했다. 축구에 대한 기본기와 체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훈련을 따라가야 하니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골키퍼가 하기 싫고' 기초를 다시 배우고 싶어 양곡고를 떠나 근처의 안용중 축구부로 들어가기도 했다.
"동료들은 어릴 때부터 축구 훈련을 해왔잖아요. 저는 시골에서 농사일밖에 한 적이 없어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농사일로 체력을 키우긴 했어도 정식으로 체력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라 그 부분에서도 많이 떨어졌고요. 좋아서 시작했지만' 집에서도 농사일이 바쁘니까 눈치도 보였고...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죠."
"그래도 축구를 너무 하고 싶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서 눈치로 이렇게 하는구나' 저렇게 하는구나를 배워나갔죠. 그러면서 조금씩 적응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더 이상 골키퍼는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용중으로 내려가 필드 플레이어로 뛰기도 했어요. 중학교부터 다시 배워서 올라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얼마 후에 감독님께 잡혀갔습니다만...(웃음)"
앞서 언급했듯이 그 당시는 골키퍼 훈련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이로 인해 김풍주는 어렵게 골키퍼 훈련을 받아야 했다. 사실 골키퍼 전문 코치의 부족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대다수의 초중고 팀들이 골키퍼 코치가 없다. 기량 발전 속도가 가장 빠른 시기에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도 없이 방치된다는 이야기이다.
"당시만 해도 골키퍼 훈련이란 것이 특별히 없었습니다. 학교 대선배셨던 필드 코치 한 분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으셔서 기초적인 부분을 가르쳐주셨죠. 각을 어떻게 잡고' 어떻게 캐칭하고 등등...그래도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힘든 점이 많았죠."
"지금도 전문적인 골키퍼 교육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죠. 교본이 책으로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어요. 일단 어린 골키퍼들의 경우에는 필드 플레이어들도 하는 패스나 킥 등의 기본 기술들을 많이 연마하라고 충고하고 싶네요. 발로 하는 기술적인 부분들을 많이 훈련해두면 나중에 빨리 발전할 수 있어요. 스텝훈련이나 밸런스 훈련 등도 필요하고요."
인터뷰 중인 김풍주 ⓒ이상헌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입문
타고난 신체조건에 성실한 훈련이 뒷받침되어 김풍주는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어느덧 톱 클래스의 골키퍼로 성장해 있었다. 이미 대학 진학도 결정된 상태. 이런 상황에서 변수가 끼어들었다. 호화멤버의 대우(현 부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다.
"고3 시절에 충무에서 전지훈련을 하는데' 대우와 연습게임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작고하신 장운수 감독님께서 저를 관찰하시더라고요. 다음날 장 감독님이 오세권 코치님(현 KFA 상벌분과위원)과 같이 오셨죠. 사실 저는 동국대에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감독님이 부르시더니 대우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대학을 가고 싶었기 때문에 싫다고 했는데' 감독님은 계속 대우로 가라고 하시고...(웃음) 그러다가 대우 숙소에 한번 가서 보고 결정하라고 하셔서 갔다가 거기서 저녁 먹고' 장운수 감독님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국 대우에 입단하게 되었죠. 이야기 듣기로는 제가 키도 크고' 큰 키에 비해서는 빠른 편이고 해서 가능성을 높게 보셨다고 하더군요."
당시 대우는 조광래' 정해원' 이태호' 박창선' 정용환' 강신우' 변병주' 장외룡 등 호화멤버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 대선배들 틈에서 20세도 되지 않은 신출내기가 함께 훈련하고 생활하려니 쉽지만은 않았다.
"장 감독님은 포스가 대단했어요. 황해도 분이신데' 검은 선글라스를 끼시고 훈련을 지켜보시면 다들 꼼짝 못했죠. 당시에 훈련을 엄청나게 많이 했는데' 기초가 부족했던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선배님들이 많이 가르쳐주시기도 했고요."
1983년 멕시코 4강 신화의 주인공들 (윗줄 정중앙이 김풍주) ⓒ월간축구
청소년대표팀에 발탁
대우에 입단한 김풍주는 대선배들 틈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K리그가 출범하기 전에 있었던 코리안리그에서 우연히 기회를 잡았고'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이로 인해 U-19 대표팀 선발전에도 참가하게 됐다.
"당시에는 실업축구였는데' 효창운동장에서 코리안리그라고 열렸어요. 어느 날 장운수 감독님이 부르시더니 경기에 나갈 자신이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정말 열심히 훈련했었기 때문에 자신 있다고 말씀 드렸죠. 그렇게 해서 경기에 나갔는데 좋은 플레이를 하면서 계속 나가게 됐어요."
"그 와중에 한양대에서 U-19 대표팀 선발전이 있었고' 저는 당연히 될 줄 알았죠. 그런데 탈락했더라고요. 저는 너무 실망해서 축구 그만둔다고 하고 대우에서도 나갔어요. 얼마 후에 장 감독님께 연락이 와서 만났죠. 장 감독님은 저에게 진짜 축구 안할 거냐고' 대표팀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웃으면서 물으셨어요. 안한다고 말씀드리자 네 실력을 제대로 보여줘서 붙어보라고 자극하시더군요. 저도 오기가 생겨서 알겠다고 하고 복귀해 진짜 죽을 각오로 훈련했죠."
마음을 다잡고 와신상담한 김풍주는 전국체전에 출전해 주전 골키퍼로 나섰다. 그리고 3경기 연속으로 승부차기에서 맹활약하며 대우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런 활약은 당시 U-19 대표팀을 맡고 있던 박종환 감독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됐다.
당시 U-19 대표팀은 지역예선에서 탈락했으나 AFC의 북한 출전 정지 조치로 인해 4개국이 리그제로 겨루는 최종예선에 극적으로 참가하게 됐고' 이 때 김풍주가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휴가를 받아 쉬고 있는데' U-19 대표팀에서 연락이 왔어요. 북한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폭력사건을 일으켜 AFC 모든 대회에 출전 정지를 당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대신 최종예선에 나가게 된 것이었죠. 최종예선을 바로 앞두고 합류했는데' 주전으로 경기를 뛰었습니다. UAE와 이라크를 꺾고 중국과 비겨 2승 1무로 U-20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하게 됐어요.”
83년 멕시코 4강 신화를 이끌다
우여곡절 끝에 1983년 멕시코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 김풍주는 이문영과 치열한 주전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그 경쟁은 월드컵 본선에서도 유효했다. 두 선수는 번갈아가며 U-20 대표팀의 골문을 지켰다. 박종환 감독은 체격조건이 좋은 스코틀랜드나 호주' 폴란드와의 경기에서는 김풍주를' 체구가 조금 작은 편인 멕시코' 우루과이' 브라질전에서는 이문영에게 골문을 맡겼다.
“첫 경기인 스코틀랜드전에서는 제가 주전으로 나섰습니다. 사실 세계 규모의 국제대회는 처음이라 긴장되는데다가 고산지대라 호흡이 잘 터지지 않아 힘든 점이 많았어요. 그래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까 걱정했던 것보다는 큰 문제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었죠.”
“이후 문영이와 번갈아가면서 경기에 나섰는데요. 스코틀랜드전을 비롯해 큰 선수들이 많은 호주와 폴란드전에서는 체격조건이 좋은 제가 나섰고' 상대적으로 작은 멕시코' 우루과이' 브라질전에서는 문영이가 나왔습니다. 감독님이 로테이션으로 기용하신 것이죠.”
U-20 대표팀은 ‘붉은 악마’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와의 첫 경기에서는 0-2로 패했지만' 이후 멕시코와 호주를 연달아 2-1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강호 우루과이에게도 2-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비록 브라질과의 4강전과 폴란드와의 3-4위전에서 1-2로 패하긴 했지만' ‘붉은 악마’가 보여준 활약상은 대단했다.
“처음에는 4강까지는 생각조차 못했죠. 다만 멕시코와의 예선 2차전을 15만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아즈테카 스타디움에서 치렀거든요. 경기장으로 들어가는데 정말 웅장했어요. 그런 곳에서 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죠. 그러면서 우리끼리 한번만 해보자는 각오를 새로 다졌고' 실제로 좋은 플레이가 나왔어요. 그 기세를 계속 탔던 것 같아요.”
“멕시코에 가기 전부터 우리는 15가지의 패턴 플레이를 집중적으로 연마했어요. 그것이 본선에서도 좋은 효과를 얻었죠. 그리고 멕시코 현지인들은 일본은 알아도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결국 우리가 4강까지 진출하니까 현지인들도 코레아라고 외치면서 박수를 보내주더군요.(웃음)”
“멕시코에서 4강 신화를 달성하고 귀국하니까 카퍼레이드도 하고 난리였어요. 우리 경기 때문에 학교도 안 가고 그랬다고 하더군요. 멕시코에서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귀국해서 보니까 우리가 큰 일을 하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1984년 대우에서 K리그 우승을 차지할 당시(오른쪽에 조광래 감독의 모습도 보인다) ⓒ월간축구
대우에서 프로 첫 우승 감격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K리그가 처음 출범했던 1983년. 김풍주는 U-20 대표팀의 장기 합숙과 선배 골키퍼 정성교의 벽으로 인해 소속팀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면서 1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84년 중반부터 정성교와의 경쟁에서 앞서며 주전을 꿰찼고' 17경기에 나서 9실점만을 내주며 경기당 0.53실점이라는 경이로운 실점율을 보여줬다. 그리고 리그 우승의 감격도 맛봤다.
“정성교 선배가 워낙 좋은 골키퍼여서 배운다는 생각으로 보냈어요.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 같고' 그 시점에서 제가 어린 나이임에도 나설 수 있었죠. 84시즌에는 몸 상태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훈련을 워낙 많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런 부분들로 인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88올림픽대표팀에서의 김풍주(가운데줄 정중앙) ⓒ월간축구
88 서울 올림픽과 90 이탈리아 월드컵
대우에서도 확실히 자리 잡은 김풍주는 1987년에도 15경기 9실점의 놀라운 실점율로 다시 한번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대표팀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86 멕시코 월드컵 최종명단에서 탈락했고' 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되긴 했지만 조병득과의 주전경쟁에서 밀렸다.
“당시에 좋은 선배들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서울 올림픽의 경우 제가 뽑히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대표팀에 들어가서도 쟁쟁한 선배들이 있으니까 제가 경기에 뛴다는 생각은 없었죠. 제가 그만큼 미흡하기도 했고요.”
90 이탈리아 월드컵의 경우에는 아쉬움이 크다. 아시아 최종예선까지는 주전 경쟁에서 한 발 앞서나갔다. 그러나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평가전에서 오른쪽 다리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회복이 되어 월드컵에 참가하긴 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최종예선에서는 첫 경기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고' 팀도 파죽지세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죠. 그런데 이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 평가전을 갖는데' 부상을 당하고 말았죠.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상대 선수와 저 사이에 볼이 바운드됐고' 달려나가 덮쳤다가 다리 인대가 늘어나고 말았어요.”
“처음에는 수술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되면 월드컵에 못 나가잖아요. 그래서 보조기를 차고 재활하는 것을 택했어요. 레버쿠젠에서 일하는 마사지사도 데려와 재활을 해서 상태가 제법 좋아졌고' 최종명단에도 선발됐어요. 그런데 그 시점에 다시 다치면서 이탈리아 월드컵은 벤치에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후 ⓒ베스트일레븐
K리그에서 전성기 구가..부상 악몽은 여전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쉬움을 맛봐야 했던 김풍주는 소속팀 대우로 돌아가서는 펄펄 날았다. 특히 91시즌은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37경기에 나선 김풍주는 27실점만을 내주며 맹활약했다. 그리고 김풍주의 활약은 대우를 다시 한번 K리그 정상으로 이끌었다. 김풍주는 강력한 리그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 그러나 시즌 막판' 다시 한번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91시즌은 최고의 컨디션이었죠. 언론에서도 최초의 골키퍼 MVP를 이야기하면서 기대감을 줬고요. 그런데 10게임 정도 남겨두고 부상을 당했어요. 훈련하다가 정강이를 차였는데' 괜찮아서 그냥 뒀는데' 굳어버리면서 무릎이 안 굽혀졌죠. 결국 유공(현 제주)과의 경기에서 4골을 실점하면서 MVP에서 한발 벗어났어요. 욕심을 내다가 그렇게 된 거죠.”
91시즌 막판에 다친 종아리 부상은 후유증으로 남았고' 동계훈련에서 다시 왼쪽 무릎 슬개골을 다치면서 김풍주는 92시즌을 통째로 쉬어야 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상황에서의 연이은 부상은 그를 힘들게 했다.
“91시즌 마지막에 부상이 있었는데' 동계훈련에서 점프를 하다가 왼쪽 무릎 슬개골을 다쳤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당시에 지금과 같은 재활치료가 있었다면 하는 점이었어요. 당시는 그냥 정형외과에 불과했어요. 만약 지금처럼 체계적인 재활치료가 가능했다면 저도 40세까지는 선수 생활을 했을 거예요.”
부활..그리고 94 미국 월드컵의 좌절
부상으로 92시즌에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김풍주는 93시즌에 다시 돌아와 건재함을 과시했다. 24경기에 나서 23실점으로 경기당 평균 1실점 미만을 내주지 않으면서 부활을 선언했다.
“운동을 쉬니까 죽겠더라고요.(웃음) 더군다나 골키퍼가 약해 대우가 힘들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요. 빨리 복귀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내다가 또 다치기도 했는데' 어쨌든 93시즌에는 확실하게 부활했죠. 경기장에 나서니 아주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웃음)”
다시 부활해 최고의 활약을 펼쳐주는 김풍주를 대표팀에서 놔둘 리 없었다. 94 미국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은 그를 다시 합류시켰다. 그러나 미국 비자까지 받고' 최종 훈련을 하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부상 악몽이 그를 덮쳤다.
“저와 (최)인영이 형' (이)운재 이렇게 세 명이 훈련을 했죠. 당시에 몸이 정말 좋았기 때문에 내심 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훈련하다가 왼쪽 무릎 인대를 다치고 말았죠.”
“한창 몸 상태가 좋을 때였거든요. 경기에 나가도 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넘쳤고요. 어쩌면 몸이 너무 좋았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아요. 몸 상태가 너무 좋아도 의욕 과잉으로 부상을 당하는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고 말았죠.”
1991년 대우에서의 김풍주(오른쪽 아래) ⓒ베스트일레븐
96시즌을 끝으로 은퇴..골키퍼계의 역사로 남다
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무릎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그 이전에도 계속해서 부상을 당했던 상황에서 다시 무릎을 다치면서 김풍주의 선수 생명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95시즌에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던 그는 팀으로부터 은퇴 권유를 받았고' 96시즌 4경기 출장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 부상 이후로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아요. 이 무렵 팀에서도 신범철이 새로 들어왔고' 저는 은퇴를 권유받았어요.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고민을 많이 했죠. 더 할 것인지' 명예롭게 은퇴할 것인지에 대해...결국 은퇴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생각이 납니다. 대우의 전성기 시절에는 수비 조직도 아주 잘 돌아가서 서로 커버 플레이를 해주면서 완벽한 플레이를 펼쳤어요. 그 덕분에 제 실점율도 많이 내려갈 수 있었죠. 제 경기당 평균 실점율이 최저라고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긍심이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지금도 계속 K리그 역사를 말할 때 따라다니는 기록이니까요.”
“그리고 비츠케이 감독님도 생각이 나는데' 이 분이 골키퍼 출신이셨어요. 항상 훈련할 때 저를 유심히 관찰하시다가 끝날 때는 저에게 지적을 하셨거든요. 오늘 너는 70%밖에 쏟아내지 못했다 등등..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하고 짜증도 났는데' 나중에는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몸에 배어서 100%로 훈련을 할 수 있게 됐죠.”
은퇴 후 김풍주는 GK 코치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친정팀 부산을 시작으로 KFA 전임 GK 코치로 활동하면서 U-20 대표팀을 맡기도 했고' 이후 울산의 GK 코치를 거쳐 현재는 다시 KFA 전임 GK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로서 그의 목표는 좀 더 체계적인 골키퍼 교육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중구난방인 한국 골키퍼 교육이 좀 더 체계화되어 유소년부터 더 진보된 훈련을 받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항상 한국은 골키퍼 교육이 취약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일단 초중고 팀에 GK 코치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GK 코치들도 각자가 가르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선수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올해 초에 12명의 GK 코치들이 모여서 비디오와 교재를 만들어보자고 논의를 하는 중이고' KFA에서도 전임 지도자들끼리 12세 미만의 유소년' 그리고 12~15세까지의 연령대에 맞춰 유소년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한국의 유소년 교육이 많이 발전한 상황이고' 그 덕분에 각종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결국 유소년이 강해야 한국축구가 강해지는 것이니까 그 쪽으로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앞으로도 유소년 쪽으로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0년 10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