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이스라엘
- 사우디 아라비아
- 박성신
- 미카엘 타라빅
- 진견진
- 탈원전
- 갈레리우스
- 콘스탄티누스
- 축구
- 주나힘교회
- MSM
- 타라빅
- 이엠효소
- 고매
- 뚜라미
- 세르비아의 영성가
- 근육과 인대 보호
- 코로나19
-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 다이어트
- 건강
- 들소
- 건강하자
- 벌침
- 이른비언약교회
- 화장을 고치고
- 우재
- 고구마
- 치유기도
- 타일공
- Today
- Total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스크랩] 1974 한대수 행복의나라로 본문
자료출처:http://ko.wikipedia.org/wiki/%ED%95%9C%EB%8C%80%EC%88%98
한대수(韓大洙, 1948년 3월 12일 ~ )는 대한민국의 남성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이며 사진작가, 라디오 DJ, 방송인, 영화배우이다
포크록 창시자 한대수, 생애 마지막 녹음!
http://www.youtube.com/watch?v=6kHiw_taToA
1974년 '물좀주소'로 파격적인 데뷔, 히피문화를 선도한 한대수는 청년 한대수가 아닌 할아버지 한대수, 양호 아빠 한대수의 느낌으로 last 버전, sad 버전 두가지 버전의 2011년판 '행복의 나라로'를 선보인다.
'생애 마지막 녹음'이라는 타이틀로 딱 한번, 원테이크 녹음으로 진행된 이번 레코딩에서 한대수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여유로움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녹음은 9월 방송 예정인 MBC 창사 50주년 다큐멘터리 '웃으면 복이와요' 제작진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음원과 함께 '웃으면 복이와요' 편집영상도 일부 공개된다. 한대수는 '웃으면 복이와요'를 통해 자신의 웃음과 노래 및 '행복의 나라로'의 마지막 녹음 현장과 거칠고 무뚝뚝한 이미지의 한대수가 아닌 세월이 흘러 인생과 융화되어 느껴지는 한대수의 유쾌한 카리스마를 보여줄 예정이다
뉴욕 사진학교에 다닐 당시의 한대수. 그의 나이 19세였다. / 한대수 제공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5/2011071501150.html?Dep0=twitter
[대중음악 100대 명반]8위 한대수 ‘멀고먼 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9131012081&code=900313
CCM 가수 임바울 행복의 나라로
핵물리학자인 아버지 한창석과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박정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한대수는 7살 무렵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뒤 이어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신학자인 할아버지와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냈다. 1955년 부산 남일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3년 뒤인 1958년에 미국으로 이민가 뉴욕 할렘에 있는 P.S 125 초등학교을 졸업했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 1964년에 입학한 경남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가 발견되어 1965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롱 아일랜드 A.G Berner 고등학교로 전학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마쳤다. 1966년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자퇴하고 적성을 찾아 뉴욕 사진학교에 입학했다.
1968년 귀국하여 송창식·윤형주·조영남과 함께 '세시봉'에서 데뷔한 한대수는 포크 록이라는 장르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무명 가수로 활동하다 1971년 해군 (149기)에 입대해1974년 제대했다. 코리아 헤럴드에서 기자로 일하던 1974년, 작곡을 해서 다른 가수에게 주었던 두 곡이 매우 유명해진 덕분에 그 해에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녹음했다. 현재 이 음반에 실렸던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등은 음악계에서 한국 포크 록의 새 장을 연 곡들로 평가받고 있다. 1975년 2집이 나왔지만 체제 전복을 꾀하는 곡들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앨범을 수거하라는 문공부의 명령을 받았다. 살 길이 막막해 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에 돌아와 오랜만에 앨범을 냈다. 그 뒤 몇 장의 앨범을 냈으며 현재는 사진을 찍거나 공연을 하며 지내고 있다.
1970년대 2집 시절 동갑내기 디자이너 김명신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 20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하는 이혼을 하게 되었고 자살까지 생각해보았으나 몽골계 러시아인인 옥사나 알페로바 (Oxana Alferova)를 만나 1992년 재혼하였고, 환갑이 다 되어 딸을 낳았다.
그는 1968년 귀국하여 송창식·윤형주·조영남과 함께 '세시봉'에서 데뷔하였고,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인상깊은 연주회를 가졌다. 조명을 모두 끈 암흑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된 공연에 어디선가 향이 피어오르고 한대수가 커다란 톱을 연주하며 등장했다. 이날 한대수가 들려준 노래 중 상당수는 그가 18세 때 작곡한 것들로 팝송 번안곡이 대중음악의 거의 전부였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이 공연은 1969년을 '한국 포크의 원년'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세시봉에서 데뷔했지만 '세시봉 세대'로 분류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히피 문화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였던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