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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 극장 " 내 기억속의 전쟁" 방송 요약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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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 극장 " 내 기억속의 전쟁" 방송 요약분

영원한 친구 주님 2013. 7. 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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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접하면서 특히 앙카라 학교에 대한 내용을 방송해서 무슨 내용인가 싶어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6.25 전쟁때에 터어키 참전 용사 " 하이다르 카르구르트"님이 한국전쟁에서 죽어가면서 보낸 한권의 수첩에 기록된 사건들을 아들 부라크가 소개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전쟁과 전쟁터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부라크는 한국 전쟁때 참여한 터어키 참전 주인공들을 만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엘튜를 큐벤(80세)고교 졸업후 장교를 모집해서 지원했다. 처음엔 호기심에 지원했다.

가디르 테킨(택시기사:83세) 전쟁이 흥분되어 지원했다.

세이트 체첸(90세)혈기왕성했던 시절에 지원했다.

터어키는 1여단 5,000명의 병력으로 1차 파병되어 1950년 10월 12일에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소풍가듯하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오스만 투르크의 후예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연합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하여 평양과 압록강까지 진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이 곧 끝날줄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달 후 30만의 중공군이 공격해오면서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3일 동안 공격하여 5km를 후퇴하였습니다. 박격포폭탄이 내앞에서 터지고, 흙더미가 나를 덮치고, 때로는 백병전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5도의 강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다시 터키 초룸은 부라크의 고향이다. 그곳에 부라크의 어머니가 계셨고, 어머니는 전쟁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일기에는 전쟁의 분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중공군이 우리를 포위하여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아있습니다. 20살 청년들이 본 것은 지옥이었습니다.

 

다시 서울 외곽에서 거주하는 서성태(고아)터키군인들을 회상하면서 부라크에게 그때 배운 터어키 민요" 우스카다라"를 불렀다.  그러면서 여자들이 길바닥에 죽어 있었습니다. 소련군들이 한국여인들을 성추행하였습니다.

다시 오경복(75세)은 피난 길에 온양온천 근처에서 오줌을 누고 왔더니 가족이 없어져 눈깜짝할 사이에 전쟁고아가 되어 버렸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소달구지 타고 피난을 갔습니다.  최동석(71)는 1951년 겨울에 피난가면서 불이 안난 집에서 자고 개구리 뒷다리를 먹고, 아카시아 순을 따서 물에 데쳐 소금 양념해서 밥하고 먹었습니다. 영등포에는 구두통과 깡통을 들고 있었고, 물만 마시고 지냈습니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대문을 두드렸으나 대문도 안 열어 주었습니다.

 

다시 터키 군인들이 전쟁터의 이야기를 합니다. 길바닥에 죽은 시신에 독수리와 까마귀들이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장의 사진에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에게 터키 군인들은 책을 읽어주었다.

 

터어키 앙카라에 터키참전군인협회(회장:슈크르 탄도간)를 찾았다. 그때 한장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녀를 찾게 되었습니다.한장의 사진은 우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나섰습니다. 그녀는 1951,52년에 자진 근로반 서클 활동하였습니다다. 그녀의 이름은 최민자(71세) 고양시에 거주하였습니다. 부르크는 찾아갔다. 당시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가족들이 피난가다 안양에서 부모보다 앞에 가다가 부모님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길을 따라가다가 허기지고, 추위에 떨고 있는 소녀를 터어키 장교 슐레이만 대위는 신발을 신겨주고 터키군 막사에서 잠을 재우고 하면서 그 소녀는 부대의 귀염둥이였습니다.

앙카라 협회의 한 참전용사인 앨튜를 규벤(80)은 케림(소녀)를 3년 동안 정이 들어 꼭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케림과 규벤)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생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규벤은 케림이 보고싶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백상기(84세)통역관이 볼때 터어키 군인들은 울부짖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담요와 빵을 나눠주고 막사의 아이들이 되어 한식구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재워주고 옷을 주어 아이들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배를 곯는 아이들을 위해 터키 군인들은 월급의 일부를 내놓았습니다. 수원에 천막을 지어주고 침대를 넣어주고 52년도 작은 군수품을 절약하여 먹였고, 전쟁 고아들은 새로운 부모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참전 군인은 김용수(여자아이)라는 한국 이름을 부르면서 그 아이를 생각하며 오빠 오빠 업어 업어 말했다고 하며, 그때 아이에게 배웟던 아리랑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샤반이란 아이가 살아있다면 꼭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김영재라는 아이는 전투중일때도 부모처럼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는 앙카라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의 자취가 다 사라졌지만 아직도 당시의 학교터는 남아 있었습니다. 강당-창고-원장실이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1955년 터키말과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두번의 이사를 하였지만 교복을 일본에서 가져와서 입혔고, 학교는 중, 고등학교까지 공부하게 했다고 합니다. 재정지원을 했습니다. 터키 군인들은 월급에서 5불을 모아 지원했습니다. 터키 군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않아 고아들에게 통조림을 보내주었다. 이곳은 따뜻하고 아늑했었습니다.

터키 군인들이 부상을 입으면 이곳 고아원에 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빨리 배우고, 똑똑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목발을 짚고도 아이들은 생기 발랄하여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터키 국가와 노래를 잘했습니다. 우리는 큰 힘을 받았습니다.그래서 밴드부를 조직하였습니다. 터키 국가를 반주하고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간첩을 잡아도 밴드부는 동원되었고, 운동장에서 행사하면 항상 밴드를 하였습니다. 터키군 위문공연을 해서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터키군인들은 반가워했고, 이뻐해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당시 앙카라 학교 출신들이 모여 형제회를 만들어 특별한 기억을 하면서 눈물흘리며 고마운 일이었다고 하였다.

 

최민자(71세)씨는 터키 앙카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슐레이만 대령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니 알라틴(95세)이란 대령 친구를 만났습니다. 8살의 소녀를 기억하면서 이름을 서울이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장교식당에서 밥을 먹고 터키말 통역도 했다.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따스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슐레이만 대령의 소식을 묻자 10년전에 보고 못봤다하여 찾아갔습니다. 파파 슐레이만은 한줌의 흙이 되어 있었다. 최민자씨는 지금도 살아계신것을 느낀다하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부라크는 터어키 후배들을 만났다. 그들은 터키 참전군인들의 후손인데 한국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투루굿, 사르펠, 하이렛딘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앙카라 행진곡을 연주하였습니다. 당시 앙카라 학교 밴드부에 활동했던 분들이 다시 모여 고려대학교 관악부 학생들과 함께 연습하였습니다. 50년만에 다시 불어보는 트럼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소절씩 따라 연주했습니다.

 

수원 앙카라 학교 공원 개원식에 염태영(수원시장)과 나지 사르바쉬(터키 대사)께서 참석하시면서 "우리는 이 터어키 앙카라 학교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곳을 통해 640명이 거쳐갔다면서 이곳에서 60년 만에 다시 앙카라밴드가 부활했다고 하면서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방송은 마무리 되어갑니다. 그들은 한국인이 우리 민족이고 내 민족처럼 생각했습니다. 부르크의 아버지의 수첩 속의 내용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내가 어머니의 손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수첩은 끝을 맺었습니다.. 51년 8월 31일 최전방에서

부르크는 아버지가 그립다며 이야기하면서 마무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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